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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예수님의 경제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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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원리와는 다른 특이한 삶을 사셨다.
세상 사람들은 최대한 이윤을 추구하고 이 세상에서 재산을 많이 모으려고 하고 또 쌓아두고 묻어두어
부를 오랫동안 추구하려고 하는데 반해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부를 축적하는데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첫 번째 경제원리: 무소유의 원칙
예수님의 경제적 생활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소유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빈털털이의 삶을 사시고 생애를 마치고 난 다음에 물질적으로 예수님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한채 남겨두지도 않았고 돈을 모아두거나 재산을 어디에 맡겨둔 것도 없었다.
예수님의 성장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검소하고 가난한데도
처할 수 있는 인품이 어려서부터 몸에 벤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 요셉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성경은 언제인지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은 적어도
홀어머니 마리아와 남동생 4명 그리고 최소한 두명의 여동생을 데리고 살아야 했던 소년가장 이었거나
혹은 청년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해야만 했었다.
다음 본문이 예수님의 가족사항을 잘 알려준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이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마 13 :55-56).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가족부양의 짐을 지셔야만 하셨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형편이 검소하고도 청빈한 삶에 익숙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경제원칙들을 소개해 본다면 다음의 성경 말씀들이 인상적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마6).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8) 등등의 말씀들은 이 세상의 경제원리 책에 나오지 않는 이상한 논리이다.
두 번째 경제원리: 가능한한 소유하지 말고 빌리라.
또한 예수님은 어떤 사물이 필요하시면 최소한의 경비로 일을 치룰수 있게 빌려서 쓰셨지
통체로 사거나 소유하시지 않으셨다.
갈릴리 바다 인근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배가 필요하셨을 텐데도 배 한척을 사거나 소유하지 않고
빌려서 쓰셨고 예루살렘 성에 평화의 왕으로서 입성을 하실때에도 나귀새끼를 소유하지 않으시고
잠시 빌려서 사용하셨다 (막 11:7). 최후의 만찬을 위한 장소를 얻기 위해 큰 돈을 지불하지 않으시고
성안 아무에게 가서 허락을 받아 유월절을 지키기위해 빌려서 사용하셨고 (마 26:18)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장사지내신바 되는 무덤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잠시 빌려서 장사지내신바 되고
더 이상 무덤에 있을 필요가 없는 분이시기에 부활 승천하셨다.
예수님은 최소한의 경비를 사용해서 그분의 공생애 사역을 이루어 나가신 것으로 여겨진다.
위의 내용을 조금 보충 설명하면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바다 인근에는 14개의 나루턱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왜 하필 제자들 가운데서 대부분을 갈릴리 출신 어부들을 택하셨을까 궁금해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신곳이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를 왕래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하시는데 반드시 필요한 교통수단이 그 당시로서는 배였다.
그럼으로 인해서 배를 빈번히 필요로 하셨고 또 배를 쉽게 조달할 수있었던 사람들도 역시
어부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기도 한다.
무덤을 빌리셨다고 하니까 의아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이스라엘의 무덤은
우리 한국식의 뒷동산에서 볼 수 있는 흙을 둥글게 쌓아 만든 무덤과는 다르다.
한국식의 무덤은 한번 묻고 나면 이장하는 외에는 다시 무덤을 열 수 없지만
이스라엘의 무덤은 바위속에 판 무덤 (마 27: 60) 이어서 무덤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있고
또 장사지낸지 1년쯤 이후에 무덤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뼈들을 추려모아 석관에다가 보관하기 때문에
정말이지 무덤을 빌려서 장사지낼 수도 있는 셈이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예수님께서 방문하셨을때에 어떤 사람들이 300데나리온 되는
향유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을 보고 아깝게 생각한 것을 볼때에 예수님이 그렇게 넉넉한 재정을 가지고
순회전도하신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막 14). 예수님과 함께 안식일날 밀밭사이를 지나갈때에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볼때에도 내핍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눅 6:1).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기간중에 소용되는 비용은 놀랍게도
부자에 의해서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여인들에 의해 후원되었다 (눅 8:3).
세 번째 경제원리: 모으기 보다는 주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모으는 경제원리보다는 주는 경제원리의 삶을 사셨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도 복되다는 말씀을 친히 실천하셨는데 (행 20:35)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통해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한푼도 받지 않으셨다.
어린 아이들을 축복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선 옷을 제비뽑는데 내어주시고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는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쏟아부어주셨다.
예수님의 주검만큼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 있었을까?
마치 제물된 소나 양이 제사장에 의해 제물로 바쳐질때에 피를 다 흘린 후에 드려졌듯이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계셨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 가셨다.
성경은 왜 예수님이 가난한 삶을 사셨는지 그 이유를 명쾌하게 알려주고 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일부러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러한 삶을 살수 있었는가 하면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이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주인이 이 세상의 재산을 조금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그랬길래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때에 천하 만국의 영광을 다 보여주며 엎드려 경배하라는 시험을 물리칠 수 있었다.
출처: 예수님의 경제원리 [월간고신 10월호 성지와 말씀이해]
정영락 목사 마산 성원교회 부목사
맺는 말:
솔직히 말해서 이땅에서 사는 우리 인생들이 예수님처럼 무소유의 삶을 살기에는 어렵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 저축해야 하고 적어도 늙어서 다른 사람에게 짐이되거나 신세지지 않기 위해서
노후를 대비해서 저축해 두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그런데 돈을 모으는 목적이 이 세상의 것에만 집중되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에게도 향하여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를 닮는 것이 당연한 것 같이 우리는 경제관에 있어서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에게 예수님은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눅 12:20)"
우리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씀이다.
당신의 재산은 땅에 많이 있습니까, 하늘에 많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최대한 이윤을 추구하고 이 세상에서 재산을 많이 모으려고 하고 또 쌓아두고 묻어두어
부를 오랫동안 추구하려고 하는데 반해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부를 축적하는데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첫 번째 경제원리: 무소유의 원칙
예수님의 경제적 생활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소유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빈털털이의 삶을 사시고 생애를 마치고 난 다음에 물질적으로 예수님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한채 남겨두지도 않았고 돈을 모아두거나 재산을 어디에 맡겨둔 것도 없었다.
예수님의 성장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검소하고 가난한데도
처할 수 있는 인품이 어려서부터 몸에 벤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 요셉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성경은 언제인지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은 적어도
홀어머니 마리아와 남동생 4명 그리고 최소한 두명의 여동생을 데리고 살아야 했던 소년가장 이었거나
혹은 청년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해야만 했었다.
다음 본문이 예수님의 가족사항을 잘 알려준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이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마 13 :55-56).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가족부양의 짐을 지셔야만 하셨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형편이 검소하고도 청빈한 삶에 익숙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경제원칙들을 소개해 본다면 다음의 성경 말씀들이 인상적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마6).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8) 등등의 말씀들은 이 세상의 경제원리 책에 나오지 않는 이상한 논리이다.
두 번째 경제원리: 가능한한 소유하지 말고 빌리라.
또한 예수님은 어떤 사물이 필요하시면 최소한의 경비로 일을 치룰수 있게 빌려서 쓰셨지
통체로 사거나 소유하시지 않으셨다.
갈릴리 바다 인근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배가 필요하셨을 텐데도 배 한척을 사거나 소유하지 않고
빌려서 쓰셨고 예루살렘 성에 평화의 왕으로서 입성을 하실때에도 나귀새끼를 소유하지 않으시고
잠시 빌려서 사용하셨다 (막 11:7). 최후의 만찬을 위한 장소를 얻기 위해 큰 돈을 지불하지 않으시고
성안 아무에게 가서 허락을 받아 유월절을 지키기위해 빌려서 사용하셨고 (마 26:18)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장사지내신바 되는 무덤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잠시 빌려서 장사지내신바 되고
더 이상 무덤에 있을 필요가 없는 분이시기에 부활 승천하셨다.
예수님은 최소한의 경비를 사용해서 그분의 공생애 사역을 이루어 나가신 것으로 여겨진다.
위의 내용을 조금 보충 설명하면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바다 인근에는 14개의 나루턱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왜 하필 제자들 가운데서 대부분을 갈릴리 출신 어부들을 택하셨을까 궁금해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신곳이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를 왕래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하시는데 반드시 필요한 교통수단이 그 당시로서는 배였다.
그럼으로 인해서 배를 빈번히 필요로 하셨고 또 배를 쉽게 조달할 수있었던 사람들도 역시
어부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기도 한다.
무덤을 빌리셨다고 하니까 의아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이스라엘의 무덤은
우리 한국식의 뒷동산에서 볼 수 있는 흙을 둥글게 쌓아 만든 무덤과는 다르다.
한국식의 무덤은 한번 묻고 나면 이장하는 외에는 다시 무덤을 열 수 없지만
이스라엘의 무덤은 바위속에 판 무덤 (마 27: 60) 이어서 무덤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있고
또 장사지낸지 1년쯤 이후에 무덤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뼈들을 추려모아 석관에다가 보관하기 때문에
정말이지 무덤을 빌려서 장사지낼 수도 있는 셈이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예수님께서 방문하셨을때에 어떤 사람들이 300데나리온 되는
향유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을 보고 아깝게 생각한 것을 볼때에 예수님이 그렇게 넉넉한 재정을 가지고
순회전도하신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막 14). 예수님과 함께 안식일날 밀밭사이를 지나갈때에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볼때에도 내핍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눅 6:1).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기간중에 소용되는 비용은 놀랍게도
부자에 의해서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여인들에 의해 후원되었다 (눅 8:3).
세 번째 경제원리: 모으기 보다는 주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모으는 경제원리보다는 주는 경제원리의 삶을 사셨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도 복되다는 말씀을 친히 실천하셨는데 (행 20:35)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통해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한푼도 받지 않으셨다.
어린 아이들을 축복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선 옷을 제비뽑는데 내어주시고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는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쏟아부어주셨다.
예수님의 주검만큼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 있었을까?
마치 제물된 소나 양이 제사장에 의해 제물로 바쳐질때에 피를 다 흘린 후에 드려졌듯이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계셨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 가셨다.
성경은 왜 예수님이 가난한 삶을 사셨는지 그 이유를 명쾌하게 알려주고 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일부러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러한 삶을 살수 있었는가 하면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이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주인이 이 세상의 재산을 조금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그랬길래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때에 천하 만국의 영광을 다 보여주며 엎드려 경배하라는 시험을 물리칠 수 있었다.
출처: 예수님의 경제원리 [월간고신 10월호 성지와 말씀이해]
정영락 목사 마산 성원교회 부목사
맺는 말:
솔직히 말해서 이땅에서 사는 우리 인생들이 예수님처럼 무소유의 삶을 살기에는 어렵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 저축해야 하고 적어도 늙어서 다른 사람에게 짐이되거나 신세지지 않기 위해서
노후를 대비해서 저축해 두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그런데 돈을 모으는 목적이 이 세상의 것에만 집중되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에게도 향하여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를 닮는 것이 당연한 것 같이 우리는 경제관에 있어서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에게 예수님은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눅 12:20)"
우리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씀이다.
당신의 재산은 땅에 많이 있습니까, 하늘에 많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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