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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과학과 격물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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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교과서를 읽는 사람은 그 작용들을 그 이론에 대한 증거로서 쉽게 받아들인다.
즉 왜 그렇게 믿어야 되는가의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도들은 증거 때문이 아니라
교사와 교재의 권위 때문에 이론들은 수용한다.
학생들에게 달리 무슨 방법 또는 능력이 있겠는가?
패러다임과 같은 그 무엇이 지각 작용 자체의 우선 조건이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사람이 무엇을 보는가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시각- 개념 경험이 그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도 달려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학 과학자는 해석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거꾸로 보이는 렌즈를 낀 사람과 비슷하다.
이전과 똑같은 무수한 대상들을 마주 대해면서 그리고 그렇게 변함없는 대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학자는 대상들의 세부적인 것의 여기저기에서 속속들이 그 대상들이 변형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개종들은 과학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들,
특히 나이가 많고 보다 노련한 과학자들은 무작정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전체를 움직이는 쪽으로 접근될 수 있다.
토머스 S.쿤 '과학혁명의 구조' 중에서 (까치글방)
플라톤은 일찍이 이데아를 논하면서
과학이나 예술들은 이데아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말을 곡해하면 과학과 예술들을 비하한다고 말할수도 있으나
저는 실상 곧이 곧대로 들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데아라는 진리에 비하면 과학과 예술은 언제까지나 이데아인 진리를 넘지도 못할뿐더러
같아지지도 비슷해지지도 않으며 항상 그 밑을 유지할뿐이라는 말에서 저차원적인 말을 한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책을 보면서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한계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은 수천년, 수만년전부터 존재하였지만 그 쓰임새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여전히 인간에 원하는 만큼만 이해하며, 그 만큼만 사용해왔습니다.
현재도 과학이라는 명분으로 진리에 다가간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그 과학이 진리에 가깝게 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원했던 이데아는 요원한일이고요.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자의적인 해석이 존재하는 동안은 과학은 자연과 멀어지며
인간을 결코 이롭게 한다고는 하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가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그 허상을 걷어버리지 않은한,
물질을 보기전에 자신과 사회에 대한 정의가 확립이 되었는지를 되집어 보고 고치지 않는한,
어리석음의 역사는, 과학일지라도 반복된다고 봅니다.
또한 패러다임의 진정한 변화는 자기본연의 것을 제대로 이해를 하며
자기와 소통에 원하게 하기 위한 노력의 산실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며,
그 무엇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진실을 향해 자기 자신뿐만아니라
사회와 과학 또한 혁명을 이루어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또한 격물치지라고 大學에서 말했습니다.
과학혁명과 자기자신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상에 직접 다가가야합니다.
내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마음인 내자신과의 대화에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명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과학에서 과학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룩한 패러다임을 실험으로 직접 증명을 해야 합니다.
그 어떤 대상이던지 겉으로만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100년을 바라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종교에서도 직접 절대자를 내 마음으로 받아들여 영접을 해야 비로서
그 참뜻을 알수 있듯이 무엇이든지 내가 직접다가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때 비로서 세계가 나와 함께 하는 하나의 경지를 볼수가 있을겁니다.
즉 왜 그렇게 믿어야 되는가의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도들은 증거 때문이 아니라
교사와 교재의 권위 때문에 이론들은 수용한다.
학생들에게 달리 무슨 방법 또는 능력이 있겠는가?
패러다임과 같은 그 무엇이 지각 작용 자체의 우선 조건이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사람이 무엇을 보는가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시각- 개념 경험이 그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도 달려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학 과학자는 해석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거꾸로 보이는 렌즈를 낀 사람과 비슷하다.
이전과 똑같은 무수한 대상들을 마주 대해면서 그리고 그렇게 변함없는 대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학자는 대상들의 세부적인 것의 여기저기에서 속속들이 그 대상들이 변형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개종들은 과학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들,
특히 나이가 많고 보다 노련한 과학자들은 무작정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전체를 움직이는 쪽으로 접근될 수 있다.
토머스 S.쿤 '과학혁명의 구조' 중에서 (까치글방)
플라톤은 일찍이 이데아를 논하면서
과학이나 예술들은 이데아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말을 곡해하면 과학과 예술들을 비하한다고 말할수도 있으나
저는 실상 곧이 곧대로 들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데아라는 진리에 비하면 과학과 예술은 언제까지나 이데아인 진리를 넘지도 못할뿐더러
같아지지도 비슷해지지도 않으며 항상 그 밑을 유지할뿐이라는 말에서 저차원적인 말을 한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책을 보면서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한계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은 수천년, 수만년전부터 존재하였지만 그 쓰임새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여전히 인간에 원하는 만큼만 이해하며, 그 만큼만 사용해왔습니다.
현재도 과학이라는 명분으로 진리에 다가간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그 과학이 진리에 가깝게 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원했던 이데아는 요원한일이고요.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자의적인 해석이 존재하는 동안은 과학은 자연과 멀어지며
인간을 결코 이롭게 한다고는 하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가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그 허상을 걷어버리지 않은한,
물질을 보기전에 자신과 사회에 대한 정의가 확립이 되었는지를 되집어 보고 고치지 않는한,
어리석음의 역사는, 과학일지라도 반복된다고 봅니다.
또한 패러다임의 진정한 변화는 자기본연의 것을 제대로 이해를 하며
자기와 소통에 원하게 하기 위한 노력의 산실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며,
그 무엇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진실을 향해 자기 자신뿐만아니라
사회와 과학 또한 혁명을 이루어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또한 격물치지라고 大學에서 말했습니다.
과학혁명과 자기자신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상에 직접 다가가야합니다.
내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마음인 내자신과의 대화에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명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과학에서 과학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룩한 패러다임을 실험으로 직접 증명을 해야 합니다.
그 어떤 대상이던지 겉으로만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100년을 바라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종교에서도 직접 절대자를 내 마음으로 받아들여 영접을 해야 비로서
그 참뜻을 알수 있듯이 무엇이든지 내가 직접다가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때 비로서 세계가 나와 함께 하는 하나의 경지를 볼수가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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