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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Re..광해왕의 묘를 능으로 격상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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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항해 중에 퍼 온 글입니다. 양해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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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대의 음모, 광해군은 왜 쫓겨났나
이 무덤의 주인공은 조선 15대왕인 광해군과 그의 부인이다.
경기도 양주군의 어느 산기슭에 묻힌 광해군..
그의 무덤은 그렇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않는 곳에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한때 조선의 왕이었지만...광해군에게 남겨진 이름은 폭군이요...쫓겨난 임금...
광해군은 왜 궁에서 쫓겨나게 된걸까?
혹시 왕릉에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대개의 왕릉은 규모도 거대할뿐만아니라 릉 주변엔 화려한 석상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지금 제 뒤에 보이는 이 광해군의 무덤은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초라합니다.
규모도 작을 뿐만아니라 주변의 석물도 이끼가 끼어있고...일부는 깨어져있기까지 한데요..
어떤 사연이 있길래...왕의 무덤이 이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게 된걸까요...?
광해군은 1608년...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여느 왕들처럼 임종하는 순간까지...왕의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왕위에 오른지 15년만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궁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광해군하면 그저...쫓겨난 왕....혹은 폭군이란 이미지 정돈데요...
그러나 광해군을 새롭게 보자는 시각이 학계에서는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사실 광해군이 15년이란 짧지않은 세월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광해군이 어떤 왕이었는지....
그리고 왜 쫓겨났는지 우리는 잘 알지못합니다.
그만큼 광해군은 역사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해왔습니다.
궁에서 쫓겨난 광해군이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은 한반도 남단의 섬, 제주도...
광해군의 유배형은 위리안치였다.
위리안치는 왕족이나 고위관리에게 내려지는 유형으로 유배인을 좁고 허름한 집에 가둔 채...
외출은 물론이고 외부인과의 접촉도 허락하지않는 중형이다.
집 주변에 울타리를 치는 것도 광해군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키기위한 것이다.
옛날 죄인을 위리안치할 경우에는 탱자나무집에 했습니다.
이게 상당히 가시가 날카롭습니다.
상당히 날카로워서 완전 외부와 차단시키는거지요.
이속에서 죄인생활을 하게되는겁니다.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탱자나무...
이것이 유배인을 가두는 가시울타리역할을 한다.
겹겹이 쌓인 가시울타리속에 지어진...작고 초라한 집...
광해군은 67 나이에 이곳에서 홀로 눈을 감는다.
기록에 의하면...
부음을 듣고 온 제주목사가 열쇠를 부수고 들어가 광해군의 시신을 염을 했다고 한다.
처량한 죽음이었다.
광해군은 죽은 뒤에도 제대로 대접받지못한다.
500여년간의 조선왕조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방대한 역사서인 실록...
그런데 광해군대의 기록은 실록이란 이름 대신 일기로 남아있다.
신병호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조선왕조실록중에서 실록이라 호칭하지않고, 일기라고 호칭하는 왕이 두명 있습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인데...이 두명은 모두 반정에 의해 폐위된 왕입니다. 이 '군'이라는 것은 왕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왕자때의 호칭입니다. 따라서 광해군일기라고 표현된 데는 광해군이 조선시대내내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추가] 원래는 3명이었다. "노산군 일기"..... 이것은 숙종 때에 단종실록으로 개칭된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광해군일기를 펼쳐보면 군데군데 붉은색으로 선을 긋고 칸을 쳐놓았다.
왜 이런 흔적이 남은 것일까?
실록 한권이 완성되기위해선 여러차례 수정작업을 거쳐야한다...
실록에 붉은 줄을 친 건..바로 실록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광해군일기는 단 두권만이 완성본으로 제작되었고, 나머지는 중간수정본상태로 남아있다.
그래서 중간수정단계에서 어떤 부분이 고쳐지고 삭제되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그런데 중간수정본의 수정된 내용을 보면 석연치않은 점들이 눈에 띈다.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활약상이 완전히 삭제되어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선조는 급히..의주로 피난을 떠난다.
이때 왕세자 광해군은 지금으로치면 임시정부라고 할 수 있는 분조를 이끈다.
조정의 일부를 분리해...
황해도와 함경도일대의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백성과 병사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전쟁이 나고 1년6개월만에 한양을 수복해..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뒤에도 광해군의 활동은 계속된다.
남쪽으로 밀려내려가는 왜군을 쫓아..
충청도와 전라도일대에서...광해군은 분조활동을 펼친다.
이러한 광해군의 분조활동은 광해군일기.....중간수정본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광해군의 분조활동으로 인해 전국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이 광해군일기 완성본에는 완전히 삭제되어있다.
한명기 교수 (명지대학교 사학과, 광해군 저자)
광해군은 어차피 쫓겨난 인물이고 그가 왕으로 있던 시절의 행적을 기록한 실록이...그를 쫓아냈던 승자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광해군일기의 내용이 승자의 입맛에 맞게 서술되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큰 것이지요.
광해군을 묘사한 부분 중엔 이런 부분도 있다.
광해군이 안질이 있어 눈이 충혈되었다는 것을...
완성본에서는 광해군이 성질이 광폭해서 눈이 붉어졌다고 전혀 사실과 다르게 적고 있다.
광해군을 의도적으로 폭군으로 그린 것이다.
뿐만아니라 후대 기록에서는 광해군을 광해군이란 이름대신 혼군, 폐주로 적고잇다.
광해군은 조선후기내내...폭군으로 인식되게된 것이다.
실록을 보면...
광해군은 마치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인것처럼 보입니다.
그 정도로 현재 실록은 광해군을 철저히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이렇게 폭군으로 기록되게 된걸까요?
인조는 광해군이 궁에서 쫓겨난 뒤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인조를 비롯해 새롭게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광해군을 쫓아낸 뒤..
그의 죄목을 자세히 밝혔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
크게 외교와 내정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외교부분은.."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는 것이고
내정부분은..".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궁궐을 지었다."는 것과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했다"는 것입니다.
뭐 여기 거론된 죄목들만 보면...광해군이 폭군이라는 건...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우선 외교부분부터 보겠습니다.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이는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후금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얘긴데요...
무슨 이야긴지...당시 국제정세를 보겠습니다.
명나라는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동북아시아에...새로운 강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후금입니다.
당시 새롭게 등장한 나라...후금은...빠르게 성장해 점점 영토를 확장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1618년 명나라의 무순성을 공격해 함락합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명나라는 조선에 지원군파병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않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지원군파병을 미루기만합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뒤에야 어렵게 파병을 결정합니다.
뿐만아니라 ..뒤늦게 파병된 지원군은 전혀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않습니다.
광해군을 궁에서 쫓아낸 세력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해 비난을 했습니다.
바로 명을 배신하고..오랑캐인 후금에게 성의를 보였다는 것인데요...
과연 그 전말은 어떻게된건지...17세기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17세기초 명에 파병된 대명지원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국 번시시 번시현..이곳에서 대명지원군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박가보...
조선에서 건너온 박씨들이 많이 모여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여느 조선족과는 달리...
주민들은 박씨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엔 이들이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또다른 흔적이 남아있었다.
원래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저기에서 살았는데 나중에 가오리팡즈라고 불렀으며...
왜 고려방이라고 불렀는지는...
어렸을 때 들어서 잘 모르겠고 옛날부터 어르신들이 그냥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그렇다면 박씨들은 언제 이곳으로 건너와 정착하게 된걸까?
박씨의 유래를 알고 있다는 할아버지를 찾았다.
이 할아버지 역시 박씨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집안내력이 상세히 적힌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이 종이는 제사때 쓰는 족보라고 한다...
족보엔...모두 11대가 기록되어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박씨가 처음 정착한 건... 삼,사백년전...조선중기가 되는 셈이다.
피아오밍판 (박명범)
1619년 원래 신빈에서 왔고, 1631년 쯤에 지금 이곳으로 왔다.
1619년이라면 조선군이 중국에 파병되던 바로 그 해다.
족보엔 박씨의 유래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피아오밍판 (박명범)
명조말년 1619년...후금 누루하치와 명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자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강홍립장군이 만여명을 이끌고 명나라를 도왔는데, 그 지원병중 한명이 저희 조상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모두 포로가 됐는데 나중에 중국에 남게되었습니다.
중국 번시현의 박씨촌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광해군때...파병되었던 대명지원군의 후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길래...
만여명의 조선군이 포로가 되어 이곳에 남게 된걸까?
중국 신빈현.. 이곳은 후금의 첫도읍지였다.
시내엔 후금이 건국할 당시...세웠던 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후금의 지도자였던 누르하치는 이곳에 머물며 명과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와 명나라군대와 합류한 조선군의 공격목표는 바로 이 성이었다.
명나라군대는 네 방향으로 나눠...후금의 도읍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 중 조선의 지원군은 남동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군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않는다.
명나라군과 합류한 조선군은 명나라군을 지원하기 위해 후방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전방에 나갔던 명나라군이 후금에게 크게 패하고 돌아온다.
그러자 조선군은 뜻밖의 행동을 보인다..
곧바로 후금에 투항의사를 밝히고 12,000여명의 병사들이 모두 후금에 투항한다.
챠오더첸 (푸순사회과학원 부원장)
명과 청은 두 번의 전쟁을 했는데 그때마다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조선은 강홍립을 원수로 하여 한 개 부대를 파견했는데 조선군대는 이번 전투에 힘을 제대로 쏟지않았다. 즉 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바로 투항했다.
과연 조선군은....전투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던 것일까?
당시 대명지원군의 총책임자는 강홍립이란 인물이었다.
강홍립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의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강홍립장군의 순검사라는 교지다.
순검사라면.. 지금의 국방부 특별검찰단으로 군부대를 감사하는 역할이다.
그런데, 강홍립의 이력은 이것만이 아니다.
강한신 (진주 강씨 사적연구회 회장)
강홍립장군께서는 원래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었습니다. 근데 중국 서장관으로 다녀오시면서 국제적 감각을 가졌으리라 보이고, 또한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하시면서, 당시 국경지대인 후금의 정세를 잘 아시고, 문무를 같이 겸비한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족보에 기록된 강홍립의 이력은 두 페이지를 넘어간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서장관... 지금으로치면 외교관이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강홍립을 선택한 건...
유창한 중국말과 외교적인 감각을 높이 샀기 때문은 아닐까?
한명기
광해군은 당시 왜란이 끝난지 얼마 되지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10000여명의 군대를 전쟁터로 보낸다는 것이 사회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단한 부담이라고 생각했지요. 따라서 가능하면 그 전쟁에 말려들지않으려고 시도했었고, 결국 명의 압력에 밀려 어쩔수없이 참전하게된 경우에도 최후까지 강홍립이라고 하는 인물을 전쟁터로 보내 명나라군사와 협상으로..전쟁에 깊이 발을 들이지않으려고, 강홍립을 정한걸로 생각된다.
광해군이 대명지원군 파병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데엔 이유가 있다.
당시 패망의 기운이 짙었던 명에 비해 후금은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현재 선양시내엔 후금의 누르하치가 세운 고궁이 남아있다.
원래 명나라 땅이던 선양을 점령한 후금은...
이곳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고, 화려한 왕궁의 면모를 갖추게된다.
지금도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고궁은...
당시 후금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짐작케한다,
명의 쇠퇴와 후금의 부상...
광해군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정세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한명기
광해군은 이미 아버지 선조를 따라 의주로 피난 갔을 무렵.. 실록의 이야기를 보면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떠오르고 있는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파악하는 부분이 도처에 보인다. 따라서 대륙정세의 변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민하게 주시해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광해군이 명을 배신했다고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중국식 사당인 동묘.
중국의 장수인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흔히 관왕묘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서울한복판에 관우의 사당이 세워진게 된 건...당시 조선과 명의 독특한 관계 때문이다.
이상협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이 동묘가 건립되게된 건 임진왜란이 끝나고 중국황제가 보낸 칙서에 당시 조선에 지원병으로 왔던 명군이 왜군을 물리친 건 관우의 혼백이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당을 짓고 모시라는 칙서를 받고, 3년공사 끝에 이 건물을 짓게되었다.
명의 요구대로 관왕묘를 짓게 된 배경엔 임진왜란이 있다.
1592년, 조선을 침공한 일본은 무서운 속도로 조선을 점령해갔다...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20여일만에 일보은 한성을 점령하고, 한반도 최북단까지 올라갔다.
다급해진 조선은 명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고...한반도 최북단까지 밀고 올라온 일본군이...
명나라까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명나라는 지원군을 파병한다.
조명연합군이 전과를 거둔 건...평양성에서였다.
평양성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에 맞서...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왜군은 남쪽으로 밀리게된다.
그러나 평양성 탈환 이후...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명나라덕분에 나라를 다시 찾게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된다.
이른바 재조지은이라는 것이다.
신병주
재조지은이라는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란을 맞이해서 이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줌으로써 조선이 다시 이렇게 건설할 수 있는 왕실이라든가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며아라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야된다는 논리가 상당히 파급되어갔다.
관왕묘가 세워진 건 이러한 사회분위기 때문이었다.
당시 관왕묘 공사를 명령하기 위해 중국 황제는 직접 글씨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이렇듯.광해군 집권당시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어느때보다 심했다.
중립외교를 펴려했던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게된 건이러한 분위기때문이었다.
서울 한복판에 삼국지의 주인공인 관우의 사당이 있다는 걸, 아는 분은 그리 많지않을텐데요.
그런데 이러한 관왕묘가 서울에만 세워진 게 아닙니다.
안동과 성주등 당시 명나라 군사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에나 관왕묘가 건립되었습니다.
더구나...당시 조선은 전쟁으로인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명나라군사들은 관왕묘를 세우는데 조선의 물자를 조달했고...
조선의 백성을 동원해 노동을 시켰습니다.
이 관왕묘의 존재는 당시 조선과 명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명에 대해 의외의 정책을 폅니다.
명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지않고, 조선에 유리하도록...외교정책을 펼칩니다.
앞서 본 대명지원군 파병 문제가 바로 그 중의 하납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급박한 정세속에서...
명과 후금사이에 놓인 광해군의 고민은 끊이질않는데요.
이후 광해군은 어떤 외교정책을 펼칠까요?
강원도 철원.
이곳에 포충사라는 이름의 사당이 하나 세워져있다.
사당에 모셔져있는 인물은 조선시대 무장으로 대명지원군의 부장이었던 김응하.
광해군은 김응하를 추모하기위한 사당을 전국 곳곳에 짓는다.
박종용 (철원군 문화재전문위원)
김장군은 1618년..광해군 10년에 명나라의 요청에 의해서, 강홍립원수의 휘하장군으로 3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명나라에 가서 청군과 싸우다 40세의 일기로 전사...
김응하는 후금군사와 싸우다 전사한 장군이다.
광해군때 세워졌다는 비석엔 김응하의 전투과정을 자세히 새겨놓았는데...
당시 적이었던 후금의 군사들조차 경의를 표할 정도로 그 모습이 비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광해군은 김응하의 사당을 함경북도 종성과 경원 등...
중국사신이 다니는 길목에 세우라고 명한다.
광해군에겐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걸까..?
뿐만아니라 광해군은 김응하를 추모하는 책까지 펴내는데...
충렬록이란 이 책엔 김응하의 전투모습이 그려져있고...
당시 조정대신들이 쓴 김응하 추모시도 실려있다..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려고했던 광해군이...
이렇게 대명지원군으로 활약하다가 죽은 김응하를 대대적으로 추모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명기
강대국과 약소국사이 외교에서 약소국은 사술을 펼수도 있다. 사술은 사기...명이란 대륙국가 후금이란 당시로선 오랑캐국가 이 사이에서 조선이 생존을 도모하려면 외교밖에 없다. 그래서 충렬록...사당 지은 건 조선의 투항이 의도된거라는 명의 의심을 제거하기위한 것이었다.
한편 광해군은 새로운 강국인 후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대명지원군으로 파병되었다가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은....
이후 7년간 후금에 머물다가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후금에 머무는동안...
강홍립은 광해군에게 후금의 사정을 소상히 알려줄뿐만 아니라 외교관 역할도 하게된다.
실록엔 당시 광해군과 강홍립사이에 오간 서신내용이 자세히 실려있다.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폈던 광해군은 안으로는 또다른 준비를 한다.
화기도감이라는..기관을 새로 만들어 무기제작에 심혈을 기울인다.
화기도감에서는 조총을 주로 만들던 조총청과는 달리...포를 주로 만든다..
광해군은 화기도감의 총책임자로 영의정을 임명한다.
그만큼 광해군은 화기제작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화기도감에서 주로 만들었던 건, 화포 중에서도 대형화기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만들었던 것이 불랑기라는 화포다.
당시 제작되던 화포들 중에, 최첨단무기라고 할 수 있는...
불랑기는 여느 화포에 비해 이동이 간편할뿐만아니라 조작이 쉽다.
일반적인 포와 비교해보면, 일반적인 포는 앞으로 포탄을 장전한다.
그런데 불랑기는 포 뒤쪽에 구멍이 나있어, 그 안에 자포를 장착해....포를 쏜다.
이러한 차이는 발사속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인 포는 포를 쏜 뒤에 포를 다시 성안으로 끌어내....포탄을 장전해야한다.
그러나 불랑기는 포는 그대로 둔채...자포만 바꿔주면, 되기 때문에...
일반포에 비해 발사속도가 훨씬 빠른 것이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이렇게 화포를 제작하는데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일까?
박재광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후금 철기는 일본과 달리 기마병. 따라서 조총보다 포가 유리하다. 광해군때 화기도감에서 화포제작하는 건 후금기마병을 막아내기위한 것...
광해군은 후금을 방어하기위한 무기로, 전차에도 마지막에 전차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광해군이 만들고자했던 전차는 이런 모양이었다.
수레에 창과 방패를 단...일종의 방패 역할을 하는 전차다.
이 전차로 진영을 만들면 마치 성벽과 같은 역할을 하게돼...
후금 기마병의 돌격을 쉽게 저지할 수 있다.
밖으로는 중립외교를 펴고, 안으로는 나라의 힘을 키우고자했던 광해군..
그는 조정대신들에게 후금과 화친하려는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명을 배신하고 후금에게 성의를 베풀었다"는 주장은 광해군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광해군을 쫓아낸 이들이 내건...
외교부분에 대한 광해군의 죄목은 그리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않습니다.
오히려 급박했던 동북아시아정세속에서...
탁월한 외교정책을 폈던 지혜로운 군주로 평가해야하지않을까요...?
그럼 이번엔 내정의 문제를 보겠습니다.
광해군을 쫓아냈던 이들은 광해군이 "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궁궐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즉, 궁궐을 짓느라 수천채의 민가를 철거하고...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는 등...
백성들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광해군이 했던 궁궐공사를 보면...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경희궁을 새로 지었고...
지금은 그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않습니다만, 인왕산에 인경궁이란 궁도 새로 지었습니다.
새로 궁궐 하나를 짓기위해선 민가를 헐어야할 뿐만아니라...
수만명의 백성을 동원해...노역을 시켜야합니다.
그런데...기존의 궁궐을 중건한 것외에도 새로 지은 궁궐만도 두 개나 되니...
분명 지나친 감이 없지않은데요.
광해군은 왜 이렇게 무리하게 궁궐 공사를 단행한 것일까요?
시청앞광장, 그 옆으로 덕수궁이 자리하고 있다.
덕수궁은 광해군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광해군이 왕위즉위식을 가진 곳은 바로 이 덕수궁이기 때문이다.
지금, 즉조당이라 불리는 건물이 1608년 광해군이 왕위즉위식을 거행한 곳이다.
그런데 당시 이곳은 지금처럼 궁궐의 모습을 갖추지못했다.
양반집을 개조해..만든 임시궁궐이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정궁인 경복궁을 두고, 덕수궁에서 왕위즉위식을 가졌을까?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건 1608년..궁궐들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임진왜란으로인해 경복궁과 창덕궁은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그래서 당시 정릉동의 양반가를 개조해 임시궁궐로 이용했던 것이다.
홍순민 (명지대학교 겸임교수)
임시로 쓰는거라 궁으로의 번듯한 자기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민가들, 야안가들을 수용해서 임시방편으로 옹색하게 불편하게 살았다.
광해군이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를 한 건 전후 복구사업이자...
전란후 왕권을 다시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또다시 두 개의 새로운 궁궐을 짓기시작한다.
광해군이 궁궐공사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김씨의 둘째아들로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임진왜란당시 분조활동을 계기로 광해군은 왕세자로 책봉된다.
그런데....선조가 뒤늦게 인목왕후 김씨를 중전으로 맞으면서 영창대군이 태어난다.
광해군이 왕세자가 된 지 16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적장자인 영창대군의 탄생은 광해군의 왕위즉위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던 광해군의 왕위즉위과정은 멀고 험난하기만했다.
홍순민
광해군은 정통성이 굉장히 취약한 왕이었다. 적자인 영창대군도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영창대군이 왕이 되어야하지 않느냐는 문제제기도 있었구요. 또 명나라에서도 광해군의 왕권..왕위를 인정하지않는 외교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통성을 보완하기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무리하게 진행한 게 아닌가... 이런 국가적인 사업을 추진함으로인해서... 자기에 대한 이의제기나 문제제기를 봉쇄하려는 목적도 있지않았나... 그런 생각도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임진왜란때 불에 타버린 용비어천가를 새로 발간한다.
용비어천가는 조선창업을 기리는 노래로 광해군이 다른 책들보다...
용비어천가를 먼저 발간한 건,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위한 것이었다.
전란이후라는 시대적인 상황과...적장자가 아니라는 출생의 한계 때문에...
광해군은 무엇보다도 왕권강화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뿐만아니라 광해군은 민심을 수습하고, 사회의 윤리기강을 바로잡기위한 사업도 펼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발간이 그것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충신..열녀등...분야별로 나눠 사례를 소개한 책으로...
충신부분엔 이순신처럼 임진왜란당시 활약이 컸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열녀를 소개한 책에는 임진왜란때, 열녀로 소문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아놓았다.
당시 광해군의 가장 큰 고민이자 과제는...
임진왜란으로 무너질대로 무너진 조선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위해 우선 필요한 건...왕권을 강화해...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었습니다.
광해군이 여러 차례 궁궐공사를 한 건...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위이후 왕권확립에 몰두했던 광해군은...
이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적인 정치를 펴나갑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동법의 시행입니다.
율곡 이이가 쓴 동호문답
이 책엔 광해군이 시행한 대동법의 원형이 실려있는데요.
대공수미법(貸工收米法)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공물 대신 쌀을 거둬들인다는 의미로 이이가 제시한 새로운 세제법입니다.
이전엔 모든 백성이 나라에 공물을 바쳐야했습니다.
그런데...이 법은 가난한 농민에겐 세금을 부과하지않고...
땅을 가진 지주에게만 쌀을 내도록하는 제도입니다.
가난한 농민을 구제해주기위한 아주 혁신적인 법안입니다.
그러나 이이가 이 법안을 처음 제시했던... 선조때엔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로인해 직접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이 법을 대동법이라고 이름을 붙여경기도지역에 시행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토의 반이상이 황폐해져...
농민들의 삶이 극도로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감안해....
기득권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법을 시행한 것입니다.
광해군은 이렇듯 전란후 나라를 바로 세우기위해...
왕권을 확립하고..민을 위한 혁신적인 정치도 단행합니다.
광해군의 내정에 있어서도 폭정을 펼친 왕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쫓겨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경상남도 합천.
이곳에 광해군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 있다.
이곳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이 초야에 묻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곳이다.
정인홍과 광해군의 사이는 각별했다.
정인홍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대신 상소를 통해 국정에 참여했다.
그런데..광해군은 정인홍의 상소를 받을때마다 빨리 한양으로 올아오라고 독촉했다.
경이 먼 곳에 있음으로 듣는 것이 본 것만 못하니
힘써 올라와서 일에 따라 바로잡아주도록 힘쓰라
광해군은 정인홍에게 영의정을 제수한 뒤...
영상이 비어있으니 어서 올라와 시국을 논의하자고 재촉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왜 이렇게 정인홍에게 의지했던걸까?
광해군과 정인홍의 인연은 임진왜란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57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인홍은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곳에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시켜, 왜군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임진왜란 당시 정인홍은 합천에 머물러있었는데...
합천에서 가까운 낙동강은 왜군의 보급품이 운반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정인홍은 청주 고령등 주변마을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불러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왜군의 보급로나 기지를 기습공격했다.
무계리전투외에도 여러차례 전과를 올렸다.
신병주
정인홍은 선조대후반 북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인홍이 선조대후반에 부상하게되는 계기는 적극적인의병활동을 통해 영향력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광해군 역시 임진왜란때 왕세자로 분조의 임무를 맡아서 적극적인 항변활동을 해나가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때 당시 정인홍이란 인물은 광해군이 믿음을 가졋을거고, 광해군이 보여줬던 전란기 위기대처능력은 정인홍과 상당히 호흡이 맞았던 요소였을 것입니다.
합천에 있는 창의사.
이곳엔 임진왜란당시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당시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세력들은 대개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세력들이었다..
그들은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대동법과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펼쳤던 광해군의 개혁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세력이었다.
광해군과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세력의 개혁정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권인호 (대진대학교 철학과 교수)
선조초년의 당쟁 분쟁속에서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나눠지는데, 북인의 대부분은 남명의 제자 화담의 제자 일부...이들은 대개 보면 개혁적인 정치...경세정치를 가지고 백성들을 위해 정치를 하려했다.
그러나 개혁적인 정책들은 기득권층의 반발로 이어졌다.
명에 대한 사대주의에 젖어있던 사대부들은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을 벌주라고 했고...
대동법으로 세금의 부담이 커진..기득권층들은 대동법의 폐지를 거론했다.
이렇게 기득권층의 반발이 커져갈즈음,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이 배후의 인물로 거론된....역모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영창대군은 목숨을 잃게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덕수궁 석어당에 유폐된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사건.
이것이 바로 광해군을 내쫓은 새력들이 주장한 광해군의 또하나의 죄목이었다.
권인호
우리가 왕의 동생을 죽였다 형님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왕을 폐출하면 태종임금은 어떻게 되고 세조임금은 어떻게되고 나중에 아들을 죽이는 인조는 어떻게 되고, 손자까지 죽입니다 인조는... 그리고 또 영조는 어떻게 됩니까? 그런 의미에서 실질적인 인조반정의 명분은 당시 대동법실시나 개혁정치를 하자 기득권세력이 자신의 것이 감소해가고 자신의 권력의 형태가 축소되어가자 이것을 만회해보려한겁니다.
결국,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지 15년만인 1623년....궁에서 쫓겨나고 만다.
한때 개혁군주로서 그 면모를 갖췄던 광해군..
그러나 죄인의 몸이 되어 19년간 모진 세월을 살아야했다.
그리고 지금 경기도 양주군에 잠들어있는 광해군.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릉이 아닌 광해군묘로 남아있다.
비석이나 석등 등이 화면속에 잘 살도록...초라한 느낌.
광해군을 내쫓고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광해군이 폈던 개혁정치를 모두 폐지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조반정직후 폐지된 대동법입니다.
뿐만아니라 외교정책도 바뀌게되는데, 명에 대한 사대를 다시 강화합니다.
당시 조선은 후금과의 일들을 모두 명에 보고할뿐만아니라...
조선이 파악하고있는 후금에 대한 정보들을 명에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정책은 결국 조선에 또다시 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후금...즉 청이 조선을 침략해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실을 무시한 외교정책으로 인해..조선은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초라하기 이를데없는 광해군의 무덤은...
지난날 광해군이 우리에게 어떻게 평가받아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지금의 잣대로 다시 해야하지않을까요?
역사란 지나간 과거로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의해 늘 새롭게 평가되고 해석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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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나 문화재청에 불만이 많이 있읍니다.
내 의견을 무시하고 범법자로 만들려고 하는데, 자제하세요! (물개사건)
김포에 가면 장릉이 있읍니다. 선조의 아들로 정원군으로 인조(능양군)의 아버지입니다.
왕도 아니면서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원종으로 추존되고, 무덤까지 릉으로 격상되었읍니다.
장릉에 가면 왕릉의 격식에 따라 왼쪽으로 원종, 오른쪽은 왕비의 능인 동원쌍보릉이다.
곡장이 둘려진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되었고, 자그마한 석양과 석호가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원 아래는 부속건물인 정자각 수라청 제향 후 축문을 태워 바라보는 곳인 망료위 표석 홍살문 등이 있다.
경사진 길에는 얇은 판석을 깔은 어도가 홍살문까지 깔려 있다.
홍살문 밖으로 능의 수호와 관리를 위한 재실과 연못이 있다.
광해왕의 능에 가면서, 자신의 자리도 못 찾고, 부속석상도 부족합니다.
위대한 한 임금의 무덤을 방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광해왕에 대한 평가도 다시해야 하는 것이고, 왕에 걸맞는 능으로 격상되어야 합니다.
댓글목록

삼무님의 댓글
삼무 작성일
인터넷 항해 중에 퍼 온 글입니다. 양해 바람니다.
---------------------------- ( 퍼 온 글 )----------------------------
님이 광해군에 대해 물었으니 아는선에서 성심껏 답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광해군 제일로 좋아하는 왕이기도 합니다..또한 조선의 왕중에서 가장 아이큐가 높은 명석한 군왕이기도 합니다....
단종이 숙부를 잘못만나 된통(?)당했듯이 광해군의 경우는 좀더 심합니다...
아비(선조)를 된통 잘못만났거든요..ㅡㅡ;;
아시다시피 광해군은 책봉되는 과정에서부터 왕재로서의 자질이 드러납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버지 선조의 아들은 14명...다구나 중전에게 소생이 없으니 후궁들은 목숨걸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 합니다....그러나 광해군의 어머니는 광해군이 3살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죠..게다가 광해군은 첫째도 아니고 둘째왕자입니다..
이런상황속에서...자신의 아들을 어떻게든 세자로 만들려는 후궁들의 거센 치마바람(?)과 형을 제치고 오로지 신하들의 신망하나로 세자가 되고 보위에 올랐을정도면 광해군이 얼마나 왕제로서의 자질을 가졌는지 알수있습니다...
게다가 임진왜란때 광해군은 왕세자의 몸으로 분조를 이끌며 노숙가지 마다하지 안으며 민심을 추스리고 의병들을 모집하는등 눈부신 활약을 펼칩니다...
적어도 그 당시 조선의 운명은 18살 젊은 세자였던 광해군이 이끌고 있었고 백성들에게는 광해군이 임금인 상황이였죠....
이렇듯 광해군의 임진왜란때의 눈부신 활약과 백성들의 민심이 광해군으로 쏠릴때...
보통의 아버지였다면..그런 영특하고 영민한 아들을 한없이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며,,더구나 그 아들이 세자였다면 더욱더 그 지위를 확고히 굳혀주고 밀어주는게 인지상정이고 도리일텐데...권력은 부자지간도 나눌수 없다는게 맞아들어갔는지..
불행히도 광해군은 그런 보통의 아버지를 두지못했죠..
광해군의 그 못난 아비가 오히겨 그런 아들을 시기하고 견제합니다...몇번씩이나 선위파동을 일으켜 아들의 군기를 잡으며 광해군을 괴롭렸죠... 세자생활 16년동안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조신해야했던 광해군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알수있죠...
게다가 이아비란자는 광해군을 친아들같이 아껴주던 중전이 죽자 자신의 아들인 광해군보다도 9살이나 어린 계집에게 새장가를 가 광해군에게 영창이라는 애물단지를 보너스(?)로 안겨줍니다..
광해군으로서는 아비에게 결정타를 맞은거죠..ㅡㅡ;;아무리 당시 광해군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30살의 장성한 세자라해도..아비가 노망이라도 나 중전에게서 태어난 3살짜리 아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면 광해군으로서는 당할수도 있는 입장이였으니까요....
어쨌든 다행이도 그 애물단지를 낳은후 2년후에 광해군의 아버지는 죽고 (씨~X2년만 발리 죽지..)광해군은 드디어 지존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로부터 조선이 낳은 최고명군중하나인 광해군의 눈부신 업적은 시작됩니다...
7년간의 전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조선을 눈부시게 재건한것도....명과 청사이의 현명한 외교정책으로 또다른 전란을 막아낸것도 바로 다 알다시피 광해군입니다...
그럴수밖에 없었죠,...대궐에서 손하나까딱안하고 편히세자가 되고 왕이된 다른자들과는 달리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성에서있던 세자였기 때문에 조선팔도 방방곡곡 돌아디며 백성들의 생활상을 똑똑히 목도하여 조선의 어느국왕보다도 현실감각에 뛰어났죠...
다시말해 조선의 상황을 그 어느 역대국왕보다도 똑똑히 알고있었다는겁니다...
이런 조선역사에 다시없을 명군이요 현군이..재위 15년째 되던 1623년3월...아버지가 쳐놓은덧이랄까...결국 아버지의 새부인인 인목과 죽은 그 아들 영창에게 발목을 잡힌데다 단종과는 반대로 조카놈을 잘못만나(ㅡㅡ;;)나락으로 떨어집니다....차라리 그때 대북파의 주청대로 인목을 죽였다면 역사는 틀려졌겠죠...
근데 그 조카 능양이란놈..참 웃기는 놈입니다,.... 큰아버지 광해군에게 역모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백부님..당신은 계모인 인목을 유페하고 이복동생 영창을 죽였소...."라는거였는데..
능양그놈은 왕이된후에 그나마 싹수가 보이던 자신의 큰아들과 손자,며느리,..다 죽여버립니다..ㅡㅡ;;
거기다 광해군이 임란의 상처로부터 겨우 안정시켜논 조선을...청나라의 침입을 불러 일으켜 다 말아먹더니..결국은 청황제앞에서 머리 피나게 꼬냐박게되죠..너무도 유명한 삼전도의 치욕입니다...다행히 광해군은 능양이라는 놈의 어리석음을 똑똑히 목도하고 유배생활 18년만에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마감하죠....
정리하면....광해군은 허균같은 혁명가와 지기로 지낼정도의 개혁적인 임금이였고...이러한 면이 당시 기득권이였던 서인의 반발을 불러온 측면도 있죠...광해군이 실시한 대동법만 보더라도 백성들에게는 좋은거였지만 서인들에게는 지들의 밥그릇하나 뺐는걸로 비쳤을테니까요..게다가 결정적인게..역시 아비를 잘못만나..ㅡㅡ;;
만약 광해군이 자신의 아들인 세종을 위해 온갓 악역을 마다치 않았던 (완전 세종의 처가,외가를 도륙내며 싹쓸이 해주었죠..ㅡㅡ;;)태종 이방원같은 아비를 만났더라면 예기는 틀려졌겠죠.....한마디로 광해군은 조선이 놓친 가장 아까운 군주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광해군의 그릇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였다고 표현하는게 맞겠죠

삼무님의 댓글
삼무 작성일
과거
광해군을 폐위하여서 청나라의 침입으로 나라를 황폐하게 하였고,
정조대왕을 독살하여서 한일합방을 일으켜서, 백성을 사지로 내몰았고,
한미FTA를 하여서 민족을 죽이려고 하는, 기득권층 죽고 싶냐?
더이상 쓸데없이 기득권층만 살겠다고 하는 이기주의를 버렸으면 한다!
닭(새)대가리 개새끼들 때문에 백성이 힘들다!
병신 반푼이같은 새끼들이 나라를 망치는 꼴을 못 보겠다!
이제 국민들도 이런 병신 반푼이 같은 새대가리 개새끼들을 믿지 말고
우리가 진정 이 사회와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하여야 한다!

김공님의 댓글
김공 작성일광해군의 격상은 현시대에 논할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역사는 사실 그대로도 중요하지만 역사가의 판단에 의해 쓰여진 것도 중요합니다. 그때 당시 조선의 사회상으로 불충과 불효는 가장 죄가 컸습니다. 사대관계를 맺고 있던 명과의 관계는 군신관계로 중립외교로 이를 어긴 광해군은 불충했습니다. 그리고 형과 어머니를 폐한것은 불효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이미 그때 사회상 여론에 의해 폐위된 광해군을 현시대의 기준으로 다시 능으로 격상한다는 것은 오히려 조선의 선대와 당시 학자들을 무시하는 처사라 생각합니다.

삼무님의 댓글의 댓글
삼무 작성일
현재 많은 역사왜곡이 있읍니다.
왜곡되고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광해군 폐위 합리화 주장들은 모반세력들의 주장입니다.
그러한 주장을 계속해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읍니다.
더욱이 사대주의하는 것들의 주장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읍니다.
당시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겠죠.

삼무님의 댓글
삼무 작성일
《Re》김공 님 ,
역사 바로 세우기란 말이 있읍니다. 과거 잘못된 역사는 바로 세우는 것이 좋읍니다.
김공님이 주장하는 것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기 위한 모반세력들만의 주장입니다.
그 기득권층 때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국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반세력(기득권)들은 철저히 무시되고, 역사는 바로 세워야 합니다.
----------------------------( 발 췌 정 리 글 )-------------------------------
조선시대 동인이 광해군을, 서인이 영창대군을 추대한 이유
1. 광해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비상상황에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났지만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1608년 즉위할 당시에 영창대군은 겨우 세살짜리 어린아이였고 광해군의 왕위를 위협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서인들이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한 적도 없으며 영창대군을 추대할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동인중에서 소북의 일부인 유영경 일파가 광해군에 대한 불만을 가지면서 1608년 축출되었었죠.
1613년 계축옥사는 대북파가 정권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과장하고 조작한 사건이었지, 서인들이 영창대군을 추대할려고 했던 사건이 아닙니다.
2. 동인은 신진사림이고 서인은 기성사림이라는 구분은 사실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것입니다. 오히려, 지역성과 학맥, 인맥, 혼맥 등으로 얽히고 정치적 견해 차이로 구분된다고 봐야죠.
예를 들어 기성사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준경의 경우, 그 아들, 손자들은 대부분 동인, 북인에 속했고,
서경덕의 제자인 박순과 허엽은 각각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졌고,
이황의 제자들은 대부분 동인, 남인에 속했지만
조식의 제자들은 정인홍 등 북인도 있었지만 정구, 김우옹과 같이 남인이 오히려 많았죠.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은 거의 100%가 서인이 되었죠.
3. 광해군이 명,청의 교체기에 중립외교를 했던 것은 사실 불가피했다고 봐야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군사력은 아주 약화되었기 때문에 여진족에 대하여 군사적 열세를 면치 못했죠. 사실 1580년 전후만 하여도 여진족은 함경도의 국경지방에서 여러번 조선과 전투를 벌였는데 조선군이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여진족이 굴복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전투에서 신입, 이일, 원균, 이순신 등이 공을 세웠었고 그 공으로 고위 무관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자, 그동안 힘을 키워 온 여진족에 대하여 명나라, 조선 모두 제압할 힘을 잃어 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에 대해서 집권층인 대북파 내에서도 반대의견이 많았었고요.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정권에서도 주류는 명분이 강한 척화파였지만, 최명길과 같이 조선의 군사력을 생각할 때 여진족과 화해해야 한다는 주화파도 소수였지만 있었습니다.
광해군 때에는 여진족도 아직 명나라에 대하여 확실한 우위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에 쳐들어 올 정도는 안되었지만, 인조 때는 이미 명나라를 요동에서 거의 제압한 상태였으므로 조선을 공격할 여력을 가지게 되었던 거죠.
결론적으로, 역사는 사실 아주 복합적이고 인과관계과 얽히고 설키어 나타나지, 동인은 어떻고 서인은 어떠했다고 딱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2. 영창대군 살해전말
이에 앞서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하자, 서자이며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그를 지지하는 대북(大北)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즉위하자 임해군을 교동(喬洞)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賜死)하였다.
그는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으나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이 성균관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衿錄: 儒籍)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退館)시켰다.
이듬해에는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으로 1백여인의 소북파를 처단하였으며, 1613년 조령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朴應犀)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꾀하려 하였다는 허위진술에 따라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하였다가 이듬해 살해하였다.

삼무님의 댓글
삼무 작성일
《Re》김공 님 ,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친모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이어린 서모입니다.
그 서모를 영창대군의 역모론에 의하여 서궁에 유페시킨 것입니다.
즉, 서궁에서 외부인과 접촉을 막았을 뿐입니다.
--------------------------( 발 췌 정 리 글 )-------------------------------
인목대비 폐비·창덕궁 중건
1615년 대북파의 무고로 능창군 전(綾昌君佺)의 추대사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1618년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와같은 실정은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책동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었으나, 한편 그는 전란으로 인한 전화(戰禍)를 복구하는 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으며,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慶德宮:慶熙宮), 1621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다.
선조비 인목왕후 김씨는 선조의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는 이유로 오만했나요?
왕실에서 유일한 적자를 생산해 냈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기양양 했을 것 입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그랬을텐데,
왕실에서는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겠습니까?
영창대군이 적자라는 이유로,
광해군은 강보에 싸인 아기와 왕위다툼을 해야 했습니다.
아마 선조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광해군은 폐세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만큼 영창대군은 광해군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왕이 된 후에도
자중하지 않고, 영창대군을 싸고 돌았습니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의 역모사건도 있었지만, 이것은 모함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결국 인목대비는 서궁에 갇혔고, 영창대군은 죽었습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조선 왕 독살사건에 이렇게 적혀있었던 듯 싶습니다)
인목대비가 그렇게 나대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 입니다
<참고로 인목왕후가 아닌 인목대비입니다.
왕후였을 때, 죽지않고 광해군이 왕 위에 올라 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김공님의 댓글의 댓글
김공 작성일불효는 불효죠 아무리 서모라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