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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Re..일제시대의 악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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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항해 중에 퍼 온 글입니다. 양해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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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 600만명(70만 사망), 군위안부 20만명
"일본, 징용 한인 첫 실태조사"
70여만 명 유골 반환여부 8월까지 한국 통보
일본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기업에 강제 징용됐다 사망한 조선인 70만여 명(추정)의 실태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5일 보도했다. 유골을 반환할 수 있는지 등을 확인해 8월 말까지 한국 정부에 통보할 계획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다음달 말 한국에서 열릴 예정인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 같은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힐 예정이다.
일본 정부가 민간인 강제징용자의 실태 조사에 나서기는 처음이다. 역사 교과서 왜곡과 독도 문제 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일 외무성은 지난달 2차 대전 당시 징용 조선인을 탄광.공장에서 고용했던 회사와 당시 회사를 이어받은 100여 기업에 징용자 명부의 유무, 유골의 안치 장소 등을 묻는 조사표를 보냈다. 기업으로부터 회답이 오는 대로 정부가 유골 반환을 위한 조사에 본격 착수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또 남태평양 등지를 중심으로 진행돼온 옛 일본군의 유골 수습 사업 대상에 조선인을 포함하는 방안도 검토키로 했다. 우선 유족들의 해외 전몰지 방문을 지원하는 '위령 순배 사업' 대상에 한국 유족을 포함할 방침이다.
일 정부는 1969년 옛 조선인 군인.군속에 대해선 연고자가 확인될 경우 유골을 넘겨주기로 한국 정부와 합의했다. 지난 3월 말까지 총 8835위가 반환됐다. 그러나 민간인 징용자의 유골 반환 요구에 대해선 "국가와 직접 고용 관계가 없었다"며 일본 정부가 거부해 왔다. 민간인 강제징용자 수는 정확하지 않으나 70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731부대
● 인간을 통나무 '마루타'로...
일본 군국주의 세력에 의해 벌어진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였던 '생체실험(生體實驗)'은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우리와는 무관한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생체실험의 잔혹상이 속속 드러나도 적잖은 조선인들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음이 밝혀지고 있어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생체실험', '마루타', '일본군 731부대', '이시이 중장의 만행' 등으로 불리는 인간말종적인 범죄행위의 실상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소련 하바로프스크 군사재판소는 1949년 12월 25일부터 30일까지 일본 관동군 제731부대 총무부장과 제1부대장(세균연구 담당), 제4부장(세균제조 담당)을 지낸 가와지마 소장에 대한 범죄행위 조사에 착수했다.
당시의 공판 기록인 '세균 전용 병기의 준비 및 사용의 혐의로 기소된 전 일본군의 사건에 대한 공개재판서류(1950년 모스크바 외국어 도서출판소 발행)'는 스미르노프 연방 검사의 가와지마 소장 심문 내용을 담고 있다. 가와지마 소장은 종전 후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스미르노프 검사 "세균전 준비가 일본이 아닌 만주에서 시행된 것은 무슨 내용인가?"
가와지마 소장 "만주는 소비에트 연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므로 전쟁을 개시할 경우 만주에서 세균전 병기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주는 세균전 병기의 연구에 관한 실험을 하는데 있어서도 아주 편리하다.
스미르노프 검사 "만주에서의 실험 실시의 '편의성'이란 무엇인가?"
가와지마 소장 "만주가 대단히 편리했던 것은 '피실험 재료'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스미르노프 검사 "'피실험 재료'란 무엇을 말하는가? 실험용으로 부대로 보내진 인간인가?"
가와지마 소장 "그렇다."
스미르노프 검사 "실험의 희생자를 호칭함에 잇어 부대에서는 어떤 은어가 사용되었는가?"
가와지마 소장 "그것은 '마루타'라고 불렀다.'
스미르노프 검사 "그 사람들은 부대내 감옥에서 각자의 성명을 그대로 가진 채 감금되어 있었는가?"
가와지마 소장 "아니다. 그들은 성명 대신 번호로 불리고 있었다."
스미르노프 검사 "그 사람들은 결국은 누구나 죽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가와지마 소장 "그렇다."
스미르노프 검사 "세균 전문학자인 당신은 전쟁의 방법으로서 살인적인 전염병을 만연시키는 일이 가공할 재난을 가져온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는가?"
가와지마 소장 "그렇다. 난 이해하고 있었다."
스미르노프 검사 "페스트 및 기타 전염병의 만연으로 초래되는 가공할 재난이 중립국까지도 엄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이해하고 있었는가?"
가와지마 소장 "그렇다. 난 이해하고 있었다."
가와지마 소장의 심문조서는 제731부대에서는 '생체실험'한 희생자들을 '마루타'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마루타'는 '껍데기만 벗긴 통나무'란 뜻으로 한자어 '환태(丸太)'인 일본식 단어이다. 인간을 생체실험의 도구로 이용하면서 인간이 아닌 통나무처럼 대한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 정권의 악마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731부대의 특설 감옥에 갇힌 포로들은 단순히 '마루타'로만 불리고, 각종의 실험을 기록할 경우 성별에 따라 '암컷 마루타', '수컷 마루타'라고만 서류에 적었다. 이들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없고 실험재료인 '마루타'만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 국가 권력 차원의 '인간도살' 프로젝트를 실시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생체실험 대상은 주로 중국인, 몽고족, 조선인, 소련인이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조선의 국모(國母)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록한 러시아의 웨베르 공사가 작성한 일명 웨베르 보고서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정부 문서관리소에서 발견되었다.
2000년 10월의 일이었다.
우리는 명성황후가 궁궐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의 칼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것을 역사교과서를 통해 알고 있다. 도대체 범행은 어떻게 모의되었으며 살해범들은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웨베르 보고서에는 일본의 비상식적인 만행을 폭로하고 있다. 그 분량만도 3백여 페이지에 이른다.
보고서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자세하게 검토하였다.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 왕비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쓰러뜨리고 가슴을 짓밟고 칼로 베었다.'
웨베르 공사는 당시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자국 공사관에 알리고 다른 외교사절들과 더불어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고종임금과 명성황후는 궁궐에 서양관을 짓고 미국인과 러시아 및 영국, 프랑스인들을 머물게 했다.
그 이유는 궁궐에 외국인이 있으면 그들의 눈을 의식해 일본인들이 함부로 궁궐에 난입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그날 숙직이었던 러시아인 사바틴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없었다면 감쪽같이 숨겨졌을 것이다. 웨베르 보고서는 그 증거가 담겨 있다.
각국 공사관들은 일본 공사관에 가서 사건의 진위를 캐묻지만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뗀다.
"불합리한 풍설을 퍼뜨리는 악의에 찬 조선인의 말보다 일본인들의 말이 더 신임할 만하다."
미우라의 말에 웨베르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목격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서양인이다."
미우라는 이 말에 당황하며 다시 알아봐야 한다면서 외국 공사들과의 회담을 서둘러 끝낸다. 아마 목격자가 모두 조선인이었다면 일본 공사관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것이다.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생생히 담은 웨베르 보고서를 통해 명성황후 최후의 날을 되짚어보자.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총성이 울리고 이것이 명성황후 살해음모의 신호탄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 제10연대는 궁궐의 북서쪽인 추서문과 북동쪽인 추동문으로 공격해온다.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공격에 시위대는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해보고 퇴각한다. 광화문에서 시위대와 일본군 간의 교전이 벌어지고 홍계훈을 비롯한 시위대 전원이 전사함으로써 광화문은 일본군이 접수하게 된다. 일을 저지르고 사태를 마무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45분 정도.
일본의 살해위협을 느낀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 건청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옥호루로 통하는 두 개의 문들은 모두 일본 사무라이들이 봉쇄했다. 여기서 러시아인 사바틴은 명성황후 살해 행동대와 마주치게 된다.
제복 차림의 일본군 장교들이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뜰에는 40명의 조선군사가 늘어서 있었다.
이 옥호루에서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살해되어 시체로 옮겨진다. 살해범들은 여기서 증거인멸을 위해 황후의 시신을 불태우고 건청궁 동쪽 숲속에 묻어 버린다.
웨베르 공사는 이 보고서의 마지막에 이런 글을 쓴다. "전쟁도 아닌 평상시에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한 추악한 만행이다."
옥호루 안팎은 명성황후를 찾아다니는 일본인들로 가득했고 명성황후는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채 일본인들에
난징 대학살
난징을 지키던 중국군이 투항을 거절하자 드디어 일본군은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13일 오전 0시10분, 일본군 제6사단의 선봉 부대가 난징 19개 성문 중 제일 견고한 중화문(中華門)을 점거하고, 이어 오카모토(岡本)부대가 성 안으로 진격했다. 당시 중국의 수도이던 난징은 이날 이렇게 무너졌다. 12월 13일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가 1808년 나폴레옹에게 함락된 날이며,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동진정책을 펴온 제정 러시아가 1898년 중국의 뤼순(旅順)항을 점령한 날이기도 했다. 이후 난징에서는 20세기 최대의 참극이 벌어진다. 목불인견(目不忍見), 천인공노(天人共怒) 등 그 어떤 말로도 난징에서 벌어진 일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다.
일본은 중·일전쟁 개전 후 가는 곳마다 학살과 강간 등을 자행했지만 특히 난징에서 대학살을 감행한 배경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의 저항이 갈수록 거세지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본 지도층은 전쟁이 장기화될지 모른다는 초조감을 느꼈고 병사들은 점차 전쟁에 지친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에 저항하면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모든 중국인에게 알려줄 희생양이 필요했고,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이 그 대상으로 선택됐던 것이다.
일본군은 난징에 진입하기 전에 치밀한 사전학살계획을 세웠다. 마쓰이 화중군사령관은 난징은 중국의 수도로 난징을 점령한 것은 국제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필히 상세한 계획을 세워 행동에 옮김으로써 일본군의 위상을 높이고 중국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서 난징 13곳에서 거의 동시에 학살이 저질러졌다.
백기를 든 중국군 포로는 물론이고 젊은 남성은 마치 가축처럼 묶여 도시 외곽으로 끌려가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또 목베기 시합이나 총검술 훈련의 연습물이 됐으며 가솔린 세례를 받은 후 산 채로 태워지기도 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사람을 산 채로 파묻고 배를 가르거나 사지를 자르는 건 예사였다. 한 생존자는 마치 하늘에서 비 아닌 피가 쏟아져 내린 듯했다며 몸서리를 쳤다.
당시 종군기자인 오마타 유키오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넣어야 했다. 다음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학살했으며, 100명 먼저 죽이기 시합도 벌였다. 미국 새너제이 머큐리지는 사망자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항저우(杭州)의 ?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200t이라며 시체는 기차 2500량을 가득 채울 수 있고 시체를 포개놓는다면 74층 빌딩 높이에 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난징대학살에 참가했던 일본 군인의 일기가 전후에 우연히 발견됐다. 이 일기는 요즘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죄없는 중국인을 산 채로 매장하거나 장작불에 밀어넣어 몽둥이로 때리거나 혹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고 적혀 있다.
난징대학살에서 잔혹한 수법의 살인 외에 세계의 지탄을 받은 것으로 강간(强姦)이 있다. 일본군에 의해 엄청난 수의 강간이 이뤄졌다. 난징대학살은 역사상 최대 집단강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의지에 반하여: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이란 책을 쓴 여성운동가 수전 브라운밀러는 난징대학살 동안 일어난 강간은 역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악의 강간이라고 지적하였다.
일본군 위안부...강제 동원 내용들 /구인광고
조선 여성의 강제 동원
일본 제국주의의 군대가 그 군인들의 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 바 '위안소'라는 것을 처음으로 설치한 것은 1931년 만주 침략을 시작한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적은 수의 위안소를 설치해 이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1937년 남경대학살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이 주둔한 모든 지역으로 확대 설치했다.
수많은 중국인을 학살하고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들이 약탈과 방화를 일 삼고, 특히 점령지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강간했다. 이러한 일본군들의 만행에 중국인들이 심한 반발을 사 반일감정이 격해지자 일본군이 점령지를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켰다. 이런 연유로 일본군은 군대가 주둔하는 모든 지역에 성적 위안시설을 하루속히 정비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조선, 대만, 만주, 중국, 남양군도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어느 곳에서나 일본군 주둔지에는 반드시 위안소가 설치되었다. 위안소는 군대가 직접 설립해서 경영하거나, 민간인에게 위탁하여 경영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2백만 명이 넘는 일본 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많은 '위안부'들은 어디서 구할 심산이었을까. 일본에서는 '천황의 신민이 될 아들을 낳아 바칠 신성한 의무'를 가진 일반 여성들은 동원하지 않고, 매춘을 직업으로 하는 공창의 여성들만을 동원했다. 물론 이들 여성이 엄청나게 많은 군인들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위안소를 세울 때부터 식민지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역시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 중에서 일본인 매춘부는 소수에 불과하고, 일부는 중국인, 필리핀인, 네덜란드인 등 일본군 주둔지의 현지인이며, 그 나머지 80-90%는 강제 동원된 약 20만 명의 조선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위안소에서 여성들을 검진했던 군의관이나 이들 여성에게서 성적 욕구를 충족시켰던 많은 군인들이 증언하고 있는 바이다. 군의관 아쏘 데츠오는 "위안부의 대부분은 조선 여자인데, 이들은 일본인 위안부와는 달리 성병에 걸린 적이 없는 깨끗한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우리는 1930년대 말부터 노골화되었던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기억한다. 창씨개명으로 조선인의 성을 없애고, 신사참배로 조선인의 정신을 빼앗으려 했다. 또한 조선민족을 만주나 시베리아로 이주시키거나 일본인과 혼혈시킴으로써 한반도에서 조선민족을 말살하고자 기도했다. 일제의 만행이 이러한 실정에 이르렀으므로 언제 죽을지도 모르며 살아서도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될 위안부, 즉 일본군의 성 노예로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동원한 것은 예정된 귀결이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전쟁에 끝난 뒤 관계 자료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민간 업자들이 여자들을 사온 것이지, 정부가 나서서 여자들을 동원한 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토록 엄청나게 많은 수의 여성들을 단지 민간업자의 힘만으로 동원할 수 있었을까. 어불성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기와 납치
전쟁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위안부 출신의 할머니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 마을에서 일본인 앞잡이 노릇을 하던 50대의 아저씨가 나에게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반장 부인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한 집에서 적어도 딸 한 명씩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식모로 있던 집의 딸을 대신해 어떤 일본인을 따라 나섰다." "집안이 가난해 너무 배가 고팠다. 어느 날 일본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며 여자를 모집한다기에 나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이 모집에 응했다." 친구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파출소 앞을 지나다가 순경에게 붙들려 그 길로 위안소에 강제로 끌려갔다." "학교 담임 선생이 정신대에 나가라고 했다. 선생의 말이라면 반드시 복종하던 때였으므로 나는 선생이 시키는 대로 일본 도오야마현에 있는 공장으로 갔다. 그러나 공장 견학만 시킨 뒤 곧바로 남양군도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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