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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Re..왜곡된 우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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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항해 중에 퍼 온 글입니다. 양해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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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우리의 역사
최태영(전 서울법대학장, 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1. 일제 시대의 역사왜곡
4331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에 앞장섰던 장본인이 바로 조선총독들입니다(중략).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하면 일본 군부의 최고 권력자였고, 한국민의 민족운동을 압살했던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취임하자,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군․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 권의 사서를 수거․불태웠습니다. 사료 수집기간은 1910년 11월부터 ≪조선사≫ 완간 직전인 1937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말살하기 위해 마련한, 1938년 6월에 발행된 ≪조선사편수회사업 개요≫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910년 1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이 51종에 20여 만 권이고, 그 뒤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천 9백 50종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지요.
일제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등을 수집시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였습니다. 일본의 사학자이면서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의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 발행)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다수 대주구 번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필요한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습니다. 현재 단군조선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 ≪삼국사기≫나 ≪ 삼국유사≫같은 사서 등을 중심으로 남겨 놓았을 것입니다.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던 초대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을 담당시켰습니다. 새로운 『조선반도사』를 만들려는 일제는 전국에서 압수․분서한 이외에 한국사 왜곡을 위해 ‘근거자료’로 일부 사서를 남겨놓고, 총독부 취조국에서 1915년 중추원 편찬과로 편사업무를 이전하기 앞서 이들 사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왜곡편사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우리민족의 대역적인 이완용과 권중현 등 부일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힌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1916년 1월 중추원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편사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 이다 가쓰미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 등 3인에게 지도․ 감독을 의뢰하였습니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4~7면을 보면, 한국사료의 대량 분서와 한국사의 왜곡편찬 배경을 극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서(즉 왜곡된 역사서)를 읽히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도 현저할 것이다…. 이것이 조선반도사 편찬이 필요한 이유 요, 또한 편찬사업의 근본정신이다”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으로 각 도청․군청․경찰서 등 위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벌린 제2차 ‘사료수색’에서는 ‘역사’와 ‘전통문화예술’ 그리고 ‘인물’ 등 압수범위도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헌병경찰제도로 무단통치를 강행했고,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말살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 내각 총리대신으로 전임하고, 그 뒤 3․1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던 제2대 총독에 이어, 1919년 8월 12일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한국사람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소위 ‘교육시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일본은 ‘자생왕조’라는 허구의 합리화 이외에도, 당시 3․1운동으로 고조된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희석시킬 고차원의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더욱이 역사왜곡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흐리게 하여 장기적인 식민지화의 포석을 굳히는데 있어서, 무력으로 한국을 병탄한 일제는 군사적․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역사적․문화적 측면’에 있어서도 일본이 한반도 지역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조작, 교육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그 시책의 하나로서 1922년 12월 훈령 (訓令) 제64호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주요인물을 중심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완용, 권중현 등 부일 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하여 떠벌려 놓은 이른바 조선사편찬사업이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사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인 사이토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명칭을 조선사편수회로 바꾸고, 일황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였습니다. 1925년 6월에는 일황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 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을 다시 앉히고 박영효, 이윤용,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편수회의 위원장급 회장들로는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 시켰습니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무려 27년간의 사료수집 기간을 제외한 35권의《조선사》편찬기간만도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 완료되기까지 만 16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업을 위해 일제가 쓴 예산만도 엄청났습니다. 일제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역사보다 2천년이나 앞서있는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말살시키기 위해 일황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킨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이마니시와 한국인 ○○○, ○○○ 박사 등 이 세사람이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들입니다.
일본인 이마니시는 ≪조선사≫ 편찬의 주역으로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 업무에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동안 앞장서 관여해 왔는데 이마니시는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의 모교인 경도제국대학에 『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の硏究)』라는 논문을 제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1916년 1월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때는 새로 편찬할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상고․삼한(上古․三韓), 즉 ‘단군조선’을 집어넣기로 결의했으나, 7년 후인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위원회 제1차 위원회에 는 상고․삼한을 단순히 ‘삼국이전’이라는 한편으로 축소하여 놓고, 1925년 10월 8일 조선사편수회 제1차 위원회에서는 ‘삼국이전’과 ‘삼국시대’를 줄여 ‘신라통일이전’이란 한편으로 하였습니다.
이처럼 일제는 ‘단군조선’ 등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습니다. 특히 일제는《조선사》가 공명정대한 학술적 사서(史書)라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장해 주는 편찬체제가 바로 ‘편년체’였습니다.
당시 사학계에 풍미되었던 실증사학을 보장해 주는 듯이 간주되었던 것이 편년체였는데 이것의 근본목적은 ‘취사선택’하여 남긴 사서에서 이 사서들을 기준으로 연도가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단군조선’을 사서에서 제외시켜 버리려는데 있었습니다.
또한 이 연장선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 등 열국시대를 말살시키려 했던 데도 그 일단의 목적을 두었습니다. 실제로《조선사》에 이러한 목적이 관철되었는데 ○○○, ○○○ 박사 등 식민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을 도입함으로써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되는 사서들을 모조리 탈취, 소각, 인멸했던 일제는 단지 고려시대 중엽과 말엽의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취사선택하여 이와 같은 사서들만 남겨놓고, 그 이전의 사서들은 소각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단군조선 등 삼국이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삼국사기≫와 단군조선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삼국유사≫는 이유야 어찌됐든, 일제가 단군조선을 부정하여 4331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역사를 말살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일제에 제시해 주는 결과를 초래한 셈입니다.
일제는 ≪조선사≫ 편찬작업을 통하여 취사선택하여 남긴, 즉 단군조선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삼국사기≫를 한국상고사의 기본사료로 못박아 단군조선을 말살, 한국사를 2천년 역사로 축소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단군조선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설 (史設)로 규제해 버림으로써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 처리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을 비롯 우리 역사가 왜곡 말살된 이유는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사료들의 소실과 새왕조가 역사에 등장할 때마다 전(前)왕조의 업적을 강등하고 파괴시킨 자괴행위, 중국을 위하는 사대사관이 낳은 역사왜곡 등이 있지만, 특히 일제침략시대 때 우리 역사를 왜곡․말살하여 교육하는, 즉 우리민족의 말살정책사관인 ‘식민사관’에 의한 철저한 역사왜곡이 그 근본이유입니다.
2. 광복 후 역사 복원 실패
(중략)나는 법률학자로서의 학문연구를《서양법철학의 역사적 배경 》이라는 책으로 총정리하면서 완결시켰습니다.(중략) 이 원고를 끝낸 직후인 1977년부터는 장도빈 선생에 이어 왜 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회복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특히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우리민족의 건국사이면서 4331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고조선)을 ‘신화’로 교육하는 것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금전에 보신 것처럼 조선사편수회는 일제 강점기 때 일왕의 명령으로
조직된 조선 역사 편찬 기관입니다.
일제는 여기에 시간과 돈을 엄청나게 투자했는데요.
조선사편수회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최대의 프로젝트였읍니다.
바로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역사서인 조선사, 그 원본이다.
이 원본은 조선사편수회의 편찬 위원들이 일일이 꼼꼼하게 손으로 적은 것이다.
전체 총 35권, 2만 4천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사,
그것은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어로 정리된 조선의 역사다.
16년이라는 긴 사업기간 100만엔이라는 거액을 투자한 것이다.
조선사편수회는 일제 강점기 때인 1925년 일왕의 명령으로 조직된 국가 기관이다.
관리는 조선 총독이 하게 했다.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지 통치 기관이 조선 총독부의 직속 기관인 것이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역사를 만드는 목적으로 위한 기관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다면
이와는 전혀 다른 방침을 가지고 임할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식민지 지배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조선사편수회입니다.
<조선인에게 일본혼을 심어 줘야한다. 그렇지 않고 조선인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일이므로 영구적이며 근본적이 사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조선인의 심리연구이며 역사연구이다.>
>>> 일제가 식민통치를 영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하여, 간교하게 조선사를 나쁘게 묘사합니다.
조선사가 욕먹는 이유가,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만들어지 것을 식민사관역사학자들이 받아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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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은 일본과도 결탈을 합니다.
많은 돈을 일본에게 투자 했을 것입니다.
일본과 영국은 덕수궁 분수대에 저주물을 심어 놓았다는 것도 내가 주장을 하였읍니다.
토론실 여론조사에 보면 덕수궁 분수대 물개(개 돼지 쥐새끼 기생충)을 상징성이 있다고 했읍니다.
왜 일제와 유대인은 고조선의 단군왕검에 대한 사실을 은폐 설화화 하려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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